마음 수련 혹은 마음챙김을 하다보면 우리가 필연적으로 해야 하는 수련이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수 많은 명사와 강연자들이 빠짐없이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알아차림'이란 실재하는 자아임에 틀림없습니다. 어느 정신학과 교수님은 우리에게 세 명의 자아가 있다고 합니다.
- 에고자아
- 경험자아
- 배경자아
그렇다면 이 중 알아차림을 하는 자아는 어느 것일까요? 그 자아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알아차림 그 이상의 존재에 대해서도 필자의 생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마음 수련은 학문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서로 통한다
위에서 정신학과 교수님의 말씀을 차용했지만 대부분의 마음챙김 수행을 하시는 분들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부분입니다. 2번의 '경험자아'에 대해서는 필자도 이번에 배운 부분입니다. 경험자아는 외부로부터 알게 되는 경험이 1번의 '에고자아'의 영양분처럼 작용합니다. 경험의 강도가 강할수록 에고자아는 단정지어 판단해 버립니다.
그러나 3번의 '배경자아'는 우리 모두가 아는 자아입니다. 바로 마음챙김을 할 때 등장하는 '알아차림'의 자아입니다. 만약 1번의 에고자아가 화가 났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1번의 자아가 실제 자신의 모습으로 발현됩니다. 파괴적이고 시야가 좁아집니다. 가끔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러나 수행자들은 이를 알아차립니다. '내가 지금 화가 났구나. 나는 너를 지켜보겠다.' 와 같은 의식이 자연스럽게 전개됩니다.
'나'이지만 또 다른 '나'가 감시하는 것이 알아차림입니다. 이를 교수님께서 3번 '배경자아'라고 표현하신 겁니다. 단어만 틀릴 뿐 우리 모두는 인식하고 있는 자아입니다.
알아차림 그 너머를 생각해본다
그러나 '알아차림'은 수행하다보면 너무나 변화무쌍합니다. 온갖 잡념과 망상이 들어 수련중에도 늘 좌절감을 느낍니다. 필자는 생각해봅니다. 수련이 마음마다 이렇게 종속적이라면 변수가 너무 많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리고 알아차림은 현실 생활에서는 조금 타이밍이 어긋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에고자아의 '화'가 더 빠를수도 있어 화를 낸 뒤 알아차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요한 상황이라면 억누르지만 번잡한 상황에서면 '화'가 더욱 빠릅니다. 수행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변수가 없는 것이 무엇일까 늘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이 있었습니다. 수행 중의 마음은 이렇게나 변하기를 반복하는데 '무엇이 마음인가? 이런 마음이 전부라면 마음은 존재할 가치가 없지 않은가?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에 의지하면 되지 않는가?'
마음 안에 세 명의 자아가 아닌 다른 무엇이 존재한다
이 포스팅의 사진을 봐 주십시오. 사람의 신체가 있고, 그 안에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필자는 그 마음 안에 원모양이지만 통로가 뚫린 원을 그렸고 그 정체를 '선(善)'으로 명시했습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 '선' 혹은 '악'으로 태어난다는 성선설이나 성악설에 대해서는 필자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논쟁적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선'과 '악'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본능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필자는 이전 포스팅에서 '자율신경실조증'에 대해 경험적으로 설명한 바 있습니다. 아래 포스팅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왜 '선'과 '악'을 이야기하는데 자율신경실조증 이야기를 하냐고 하시겠지만 저는 제 병의 원인이 '악'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마음 안의 '악'이 활개를 치면 그림의 통로를 통해 마음은 오염되고, 마음과 연결된 몸은 병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약 마음 안의 존재가 '악'이 아닌 '선'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선'은 긍정적이고 에너지 그 자체입니다. '선'을 행하는데 몸이 아프다거나 양심이 찔리는 일이 과연 있을까요? 그런 이유로 여러분에게 어떤 형태의 '선'이라도 마음에 자리잡게 된다면 여러분은 수행에 있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필자는 감히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필자의 경험이 그렇습니다. 마음 안에 '선'이 있다고 매분 매초 이미지 트레이닝을 합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며, 치유의 길입니다.
그리고 SNS를 끊고, 매일 살인과 강도가 판을 치는 뉴스를 보지 않으며, 댓글을 전부 지워버립니다. 그간 논쟁적이었던 주식 종목토론방의 글도 전부 지워버립니다. 이런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선을 행할 수 없다면 적어도 악을 행하지 말라.' 저는 이것이 역으로 '선'의 실천이라고 생각했고 모조리 '악'의 행동을 지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실천이 점점 저를 떳떳하게 만들고 마음에 의지할 곳이 생긴 것을 느끼게 했습니다.
결론
옛 고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행자가 '마음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이 마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좀 해주십시오.'라고 유명한 고승에게 요청하자 고승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 마음이라는 것을 가지고 오너라.' 행자는 그 대답에 단박에 깨닫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늘 괴롭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열어보일 수는 없습니다. 표현하는 방법은 말밖에 없습니다. 말은 공허하고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일로 인해 상황이 변하고 난 뒤 알아차려 들여다보는 것은 종속된 일입니다. 고통이 수반됩니다. 하지만 우리 안의 '선'은 우리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출발이 '선'이라면 우리가 종속될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통제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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